삼탄교회
연면적 - 274㎡ (83 평) / 본당좌석 - 80석
천등산 박달재의 한쪽기슭
충주호의 끝자락이 보이는 곳
이곳에 수몰되고 남은 몇채의 가옥과
충북선 비둘기호가 몇시간마다 기착하는
조그만 시골역 삼탄이 있다.
역이름이 암시하듯
충주호로 흘러들어 가는 물길이
제천에서부터 구비를 틀어
이곳에서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서 여름한철은 그나마 적지않은
유람객들이 모여드는
한적한 시골의 유원지이다.
이곳에 젊은 목사가 부임하여
버리고간 교회를 추스리고
흩어진 양떼를 돌보는
헌신적인 목회가 수년간 계속되었다.
마침내
무모하다할 예배당의 신축계획을 세우고
한가닥 인연으로 나를 찾아왔다.
함께 현지를 답사하고 듣게된 교회의 현황은
우리나라의 농촌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교인이 어린이를 포함하여 이십여명
출석교인중 성인은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
아! 이곳에 어떻게 교회를 지을 수 있을까?
대충 비바람을 막고 십자가를 세우기에는
도시의 화려함도 마다하고
온식구가 함께 땅을 파면서 헌신하며 올리는
이 젊은 목사의 기도소리가 내내 가슴속에 울려온다.
그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열정을 재료에 담고
아름다운 자연, 소박한 풍광일랑 거슬리지않도록
소담한 교회를 그리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이곳에 넘치도록 하자.
교회앞 충북선 철길을 달리는
화물열차 승무원들에게는 피안의 등대처럼
한여름의 유람객들에게는
순례하는 마음으로 찾게되는 그런 교회를 짓자.
철길의 소음은 막아내고
철길건너 풍경은 하나가 되도록 하자.
해서
블록으로 벽을 쌓고 그벽에
둥그렇게 창을 내고 여덟개의 기둥위에
하늘로 열린 지붕을 얹고
팔각형의 예배당을 세웠다.
한 모퉁이를 터 벽을 세우고
뒤에는 기도실, 앞에는 제단으로 삼았다.
일년여만에 준공된 새성전에서
입당예배를 드리던 날
육성으로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
천상의 울림처럼 들려오던
찬송소리를
나는
내내 잊지 못할것 같다.
-이용우-





건축의 현대적 감각과 담당건축가의 풍토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인상 깊은 예배당이다.
-이은석(경희대 건축과 교수:목회와 신학 2000.11)
한국적 미를 계승한 삼탄교회
-삼탄교회 지은 이야기-
남기완 (목사, 충주엄정교회)
교회소개
삼탄교회는 충주에서 제천을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산척면이라는 작은 면에 있다. 이 교회는 면 소재지에서도 천등산과 지등산을 가르는 높은 고개를 넘어 약 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골 교회이다. 원래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충주호가 생긴 뒤로 약 120호 되는 주민들이 주로 임업, 농업과 더불어 민박이나 어업 등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교회는 1987년 10월에 세워졌다. 현재의 김영근 목사 내외가 오래 전에 폐교한 강변의 재건 고등 공민학교를 빌어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가 이곳에 처음 세워진 교회는 아니다. 이미 6번이나 교회가 세워졌다가 문을 닫은 곳이다. 또 70년대 초에는 '호생기도원'이라는 사이비 종파가 집단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곳이었다. 주민들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마음이 닫혀 있었다. 원래 선교사를 지망하였던 김목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사역하여 한때는 아동부 중고등부등 모두 100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느 시골 교회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상급학교를 진학하면서 떠나가고 매년 계속되는 이농 현상으로 교인들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현재는 아동부 20여명과 중고등부 5명 장년 13명이 교인의 출석하고 있다.
교회건축의 동기와 과정
그동안 교회겸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몹시 낡고 추위에 무방비인 건물이었다. 겨울이면 방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김목사는 만성 비염에 그리고 세 자녀는 감기, 기관지염, 천식 등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더구나 여름이면 마당까지 물이 차서 늘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던 중 90년에 큰 홍수가 났고 건물이 물에 잠겨 가재 도구와 책이 물에 잠기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너무도 초라하고 무력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에 큰 걸림돌이 되기까지 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사역한 후에 선교사로 떠나려 했던 김목사는 파송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금 떠난다면 7번째 문닫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교회 부지라도 마련해 놓아야 후임자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총회 사회부에서 보내준 복구비와 여러 교회에서 보내준 수재 의연금을 모아서 현재의 부지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대지 461평과 전 246평으로 시가 7,000만원이나 하는 땅이었다. 당시 있던 1,000만원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하심으로 농협에서 대출 받은 돈을 합하여서 3,000만원에 구입하였다.
그후 3년간 이 부채를 해결하느라 김목사의 사례비와 보조금이 모두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지 구입뿐 아니라 건축까지도 그에게 맡기셨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 모교회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구두로 약속 받은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던 '토(土) 건축사무소'의 이용우 집사에게로 가서 무료로 설계를 받아 마침 정년 퇴직한 아버지의 퇴직금 2,800만원으로 착공을 하였다. 그러나 건축비 지원을 약속했던 교회는 본 교회 교육관 건축을 핑계로 지원 금을 보내 주지 않았고 이때부터 건축비 마련을 위한 피 말리는 일이 시작되었다. 우선 부지를 담보로 효성교회 신협으로 부터 1,500만원을 대출을 받아 1차 중도금을 치렀으나 계속되는 건축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김목사는 건축비를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려고 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 기도중에 하나님은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을 통해 "내가 너의 발의 등이 되어서 한걸음씩 한걸음씩 인도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기적적인 일들이 여러 번 나타났다. 한 번은 우연히 성결신협에서 대출업무를 보고 있는 사모님의 친구를 만나 2,000만원을 대출받게 되었고 산척농협으로부터 2,000만원을 대출 받기도 하였다. 충주 북시찰과 효성교회의 지원 등으로 어렵게 건축을 마치고 1996년 4월 입당하게 되었다.
교회 건축 구상
김목사는 교회 건축하기 전에 교회가 이 곳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였다. 아름다운 경치, 대학생들의 M.T장소로 자리 잡혀가는 곳,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 간이 역 같은 작은 기차역이 있는 곳에 세워지는 이 교회는 예배 장소로서 뿐 아니라 선교 훈련, 경건 훈련으로 유용하게 쓰여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주민들을 위한 문화 센타로써의 역할도 하게 될 것으로 봤다.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이 이 교회를 발견하고는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번 찍어 보고 싶고 사진을 찍은 후에는 그 안이 궁금해 져서 둘러보고 그 안의 분위기가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처음 신앙에 대한 추억이 떠올려 지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동경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위한 공간, 세미나를 위한 공간 등을 연차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마스터 플랜도 함께 세웠다.
설계자는 직사각형 모양의 천편일률적인 교회의 모습을 탈피하고 한국적인 미를 갖춘 교회를 짓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시골 교회의 형편을 고려하여 유지 보수에 돈이 들지 않고 한 번 지으면 오래 사용될 수 있게 설계를 하였다. 또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튀어나오지 않게 하였고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예배실에서도 만끽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건축의 특징
건축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가마솥을 형상화하여 교회 건물에서 한국적인 맛이 은근히 풍겨 나오게 하였다. 지붕 부분은 원형의 곡면 슬라브를 하여서 보기에 따라서는 가마솥 뚜껑 같기도 하고 한국의 갓 같기도 하다. 외부 마감은 골조 부분은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벽은 시멘트 압축 블록을 사용하였으며 미장을 하지 않고 노출시키고 줄눈(메지)을 넣었다.
그리고 골조를 따라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창은 예배실에 앉아 있으면 마치 원두막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였고 현관 부분은 유리 블록을 사용하여 채광과 함께 현대적인 멋을 주고 있다. 지붕 한가운데 유리로 돔형 모양의 창을 만들어 자연 채광이 되도록 하였다.
바닥은 온돌 파이프를 깔아서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우드스트롱으로 마감을 하였다. 예배실은 원형으로 만들었고 약간의 공명이 이루어져서 설교시 마이크가 없이도 잘 전달되도록 하였다. 예배실 벽과 천정은 드라이비트로 마감하여서 단정하면서도 약간의 흡음(吸音)도 이루어지게 하였다. 강단 부분은 가는 스텐레스 파이프를 이용하여서 만든 십자가가 걸려 있는데 심플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강단의 높이는 아주 낮게 하였고 의자가 아닌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강단에 보통 놓여져 있는 의자를 치웠다. 이것은 강단에 앉아 있는 것이 자칫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받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는 목회자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십자가 탑은 외부에 별도로 세워져 있는데 역시 노출 콘크리트 마감에 H빔을 사용하여 시공하였다.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외부에 별도로 시공하였는데 겨울철 동파가 염려되기도 한다. 보일러실은 6평 규모로 지하실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다.
시공하는 동안 오지(奧地)여서 자재 조달이나 인력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고 규모가 작으면서도 모든 공정을 다 거침으로써 노임이나 재료의 손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총 건축 규모는 60평으로 약 1억 2천만원 정도가 소요되었다.
삼탄교회의 외관을 멀리서 보면 팔각정 같아 보이고 가까이에서는 갓이나 솥뚜껑을 연상하게 하여 한국적인 면을 살리면서도 자재나 시공 방법은 현대적인 것으로 하였다. 한국적이면서도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교회의 거룩성과 상징성도 잘 나타나 보인다. 공사비에 있어서도 비교적 저렴하게 시공을 하였고 시공 상태도 매우 훌륭하였다. 값싼 건물 같지 않은 건물이다.
한국적인 미와 함께 저렴한 비용, 견고성을 함께 갖춘 우리 시대 교회 건축 양식에 새 모델을 제시하는데 성공한 건물로 보인다.
(농촌과목회 1999.3 창간호)


